이 때문에 근대적 지식인들에게 조선 정부와 청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구 세력.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학계와 시민사회의 거리를 좁힐 때 더 이상 역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도 이미 너무 늦었다.결국 이들 중 일부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겨 은사금을 받고 일본 군국주의를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길을 걸었다.이들은 일본의 한반도 내정 개입이 조선을 강한 국가로 자립하게 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조선이 완충지대가 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자립을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했다.일본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은 새로운 개혁을 위한 모델이었다.
조선의 식민지화 책임 문제는 크게 일본의 책임론과 조선 정부의 무능론으로 나뉘었다.타협과 연속성의 공동 성취 그러나 국가공동체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타협과 연속성이 가져다준 공동의 성취에 대해서는 균형의 눈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의 결정적인 세 시초를 갖고 있다.비자금 사건처리도 공통의 민주주의 문제였다.
5·18특별법의 제정은 광주정신 및 김대중과의 공동 원칙을 의미했다.군사권위주의 시기에 빈곤국가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한 데 이은 일대 성취였다.